베트남 생활 기록 23

하노이에서 서류 하나 때문에 멘붕 왔던 날의 기록

인간의 인내심이 종잇장처럼 얇아지는 순간이 있다면, 아마도 낯선 타국의 공공기관 창구 앞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제가 딱 그런 날이었습니다. 비자 연장을 위해 몇 날 며칠을 준비한 서류 뭉치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출입국 관리소로 향했지만, 결과는 참담한 '빠꾸'였습니다. 그것도 제가 전혀 예상치 못한, 아주 사소해 보이는 종이 한 장 때문이었죠. 그 순간 제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고, 등 뒤로는 차가운 식은땀이 흐르더걸요.내 노력이 부정당하는 3초의 순간"이거 없어요. 다시 해오세요." 무표정한 직원의 한마디와 함께 서류 뭉치가 제 쪽으로 밀려왔습니다. 제가 놓친 건 아주 작은 거주 확인증 사본이었는데, 하필 집주인이 해외 여행 중이라 당장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3주 동안 공들여 준비한 모든 과정..

직접 발로 뛰며 알게 된 베트남 비자 연장 시 주의할 점

하노이 출입국 관리소(Số 44 Trần Phú)의 그 차가운 공기는 몇 번을 가도 적응이 안 되네요. 이번 비자 연장도 순탄치 않을 거란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에서 본 서류들을 꼼꼼히 챙겼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창구 앞에 서니 직원의 무심한 손짓 한 번에 제 서류들이 다시 제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서류는 공증 날짜가 지났어요."라는 짧은 한마디에 등 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더군요. 하노이의 한낮 더위 속에서 다시 공증 사무소를 찾아 헤매야 했던 그날의 기록을 남겨봅니다.공증 날짜 때문에 다시 돌아갔던 날가장 크게 당황했던 건 서류의 유효기간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챙겨온 서류니 당연히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베트남에서는 공증받은 지 3개월 혹은 6개월이 지난 서류는 인정해주지 않는 경우가..

베트남에서 몸이 아프니 한국에 계신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던 밤

어젯밤에는 열이 좀 나더군요. 하노이의 습한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몸이 지친 건지 모르겠지만 머리가 깨질 듯 아파서 혼자 끙끙 앓았습니다. 약장 서랍을 뒤져봐도 죄다 베트남어로 쓰인 약들뿐이라, 이걸 먹어도 되나 싶어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냥 물 한 잔 마시고 침대에 누웠습니다. 캄캄한 방 안에서 천장을 보고 누워 있으니, 참 신기하게도 한국에 계신 어머니 생각이 제일 먼저 났습니다.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도 꼭 이렇게 몸이 무너지면 마음이 먼저 고향으로 달려가네요.머리맡을 지켜주던 그 투박한 손길의 기억어릴 때 열이 나면 어머니는 꼭 수건을 찬물에 적셔다가 제 이마 위에 올려주곤 하셨죠. 자다가 눈을 뜨면 늘 머리맡에서 지키고 앉아 계시던 그 투박한 손길이, 이 먼 타국에 와서 아프고 나니 왜 ..

처가 식구들과 첫 식사 자리, 문화 차이 때문에 진땀 흘렸던 하루

베트남 아내와 결혼을 약속하고 처음으로 처가 식구들을 한자리에 모시고 식사하던 날, 저는 한국에서 가져온 정장을 챙겨 입고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하노이 근교의 조용한 마을, 처가 댁 마당에 깔린 돗자리를 본 순간 제 계획은 첫 단추부터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수십 명의 친척이 모인 그 자리는 제가 상상했던 정갈한 식당이 아니라, 거대한 '동네 잔치'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훅 끼쳐오는 습한 열기와 함께 왁자지껄한 베트남어가 마당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좌식 문화와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요(Yo)!'가장 먼저 저를 당황하게 만든 건 돗자리 위에 옹기종기 앉아 밥을 먹는 좌식 문화였습니다. 한국도 좌식이 익숙하다지만, 좁은 공간에 수많은 사람이 밀착해 앉아 몇 시간 ..

퇴근길, 갑자기 쏟아지는 하노이 비 때문에 멈춰선 10분

방금까지 멀쩡하던 하늘이 갑자기 무너져 내리는 걸 보니 역시 하노이는 하노이네요. 오토바이를 세우고 근처 건물 처마 밑으로 간신히 몸을 피했습니다. 빗줄기가 얼마나 굵은지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헬멧을 벗고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는데, 옆에서 같이 비를 피하던 베트남 청년이 담배 한 대를 권하네요.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그 친구의 무심한 눈빛이 왠지 싫지 않았습니다. 길 건너편 노점상은 익숙한 듯 비닐 천막을 치고 그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빗소리를 배경 삼아 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저 사람들에게 이 비는 그저 하루의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일상일 텐데, 저는 왜 이렇게 마음이 급했나 싶습니다. 젖어버린 운동화를 보니 짜증이 확 올라오다가도,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 소리를 듣고 있으..

하노이 생활 3년 차, 가끔 찾아오는 묘한 고독감에 대하여

오늘 퇴근길은 유독 오토바이 경적 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때렸습니다. 하노이 생활도 이제 3년, 이 지독한 소음과 매연에도 이력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가끔은 이렇게 예고 없이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네요. 헬멧 사이로 끈적하게 들어오는 하노이 특유의 덥습한 공기가 오늘따라 유난히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습니다. 사실 베트남에서 가정을 꾸리고 아내와 함께 지내면서 외로울 틈이 어디 있겠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맞는 말이죠. 퇴근하고 집에 가면 따뜻한 밥이 있고 나를 반겨주는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큰 축복입니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방인 특유의 고독감이 불쑥 찾아오곤 합니다. 이건 한국말로 마음껏 수다를 떨고 싶은 갈증이라기보다는, 그..

별거 아닌데 괜히 웃음이 나왔던 하노이의 저녁

퇴근길 정체는 평소보다 조금 더 심했다. 하노이의 금요일 오후는 늘 그렇듯 오토바이 매연과 경적 소리가 뒤섞여 거대한 소음의 장벽을 만들어낸다. 헬멧 속으로 땀방울이 흘러내려 눈가가 따끔거렸지만, 핸들을 쥔 손을 뗄 수가 없어 그냥 눈을 몇 번 껌뻑이며 버텼다. 앞차의 번호판 숫자를 의미 없이 세어보기도 하고, 옆에 선 버스 창문에 비친 내 초췌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특별히 기분이 나쁜 것도,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닌 그냥 무채색의 시간들이 도로 위에서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빨리 집에 가서 씻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머릿속에 들어찬 것이 없었다.집 근처 골목 입구에 다다랐을 때, 평소에 보지 못했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부채질을 하던 구멍가게 아저씨가 길을 지나..

베트남 은행에서 계좌 하나 만들려다 하루를 다 보낸 사연

베트남에서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이제는 웬만한 행정 업무에는 이력이 났다고 자부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비자도 직접 해결했고, 병원 이용이나 보험 문제도 나름의 시행착오 끝에 정리가 되었으니 '은행 계좌 만들기'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하노이 시내의 한 유명 은행 지점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제가 마주한 현실은 또 한 번 저의 오만함을 깨뜨려 놓았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아주 사소했습니다. 현지에서 생활비 관리를 조금 더 효율적으로 하고 싶어 현지 은행 계좌가 필요했고, 아내의 추천을 받아 가장 신뢰도가 높다는 대형 은행을 찾았습니다. 한국에서 계좌를 만들 때처럼 신분증 하나면 충분할 거라는 생각에 여권만 달랑 챙겨 나섰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은행 입구에서 번호표를 뽑고 30분을..

베트남 비자 연장, 하노이 출입국 관리소에서 보낸 인내의 기록

베트남에서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비자'라는 단어와 평생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러 번의 비자 갱신을 겪었지만, 이번만큼은 대행사의 도움 없이 제 발로 직접 하노이 출입국 관리소를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했지만, 현지인 아내와 가정을 꾸리고 사는 입장에서 이 나라의 행정 시스템을 직접 마주하는 과정이 한 번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짜, 그때는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돈 주고 맡길걸.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결정은 제 베트남 생활 중 가장 땀을 많이 흘린 날 중 하나로 기억될 것입니다. 하노이 팜응옥탁(Pham Ngoc Thach)에 위치한 출입국 관리소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수많은 인..

하노이에서 아무 일도 없던 하루가 오히려 기억에 남는 이유

오늘은 정말이지 아무 일도 없었다. 아침 7시 15분, 평소보다 조금 늦게 눈을 떴을 때 천장에서 돌아가는 실링팬은 어제와 똑같은 속도로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창밖은 하노이 특유의 습한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오토바이 경적 소리는 습기에 짓눌려 평소보다 둔탁하게 들렸다. 침대에서 일어나 발바닥에 닿는 타일의 서늘한 감촉을 느끼며 주방으로 향했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물이 끓기 전까지의 그 짧은 정적 속에서 나는 내가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잠시 잊기로 했다. 특별히 바쁜 일이 없어서라기보다, 그냥 그 순간의 정적이 깨지는 게 싫었을 뿐이다.연유를 듬뿍 넣은 카페쓰어다 한 잔을 내리고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커피잔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내 안경 너머로 번졌고, 나는 그 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