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25

사랑만으로 버티기엔 베트남 생활은 역시 현실이었다

처음 아내를 만나 베트남행을 결심했을 때만 해도 내 머릿속은 온통 핑크빛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지옥이라도 가겠다"는 유치한 대사가 내 삶의 모토가 될 줄 알았다. 하노이의 매연도, 낯선 언어도 아내의 미소 한 번이면 다 녹아내릴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공항 게이트를 나서는 순간 마주한 하노이의 습한 공기는 내 낭만을 순식간에 현실의 눅눅함으로 바꿔놓았다. 사랑은 분명 위대하지만, 매일 아침 눈을 뜨며 마주하는 베트남의 아침은 지독하리만큼 현실적이었다.언어라는 장벽 앞에 무너진 로맨티시스트가장 먼저 나를 괴롭힌 건 침묵이었다. 아내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도 내 짧은 베트남어와 아내의 서툰 한국어 사이에는 늘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었다. 마음속엔 수만 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치는데, 정작 입 밖..

아내랑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는데 편했던 순간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탁을 치우는 소리가 멎었다. 하노이의 밤은 늘 그렇듯 창밖에서 들려오는 오토바이의 낮은 저음과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웃집의 TV 소음으로 채워져 있었다. 거실 스탠드 하나만 켜둔 채 우리는 소파 양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내는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고, 나는 낮에 읽다 만 잡지의 광고 면을 무심하게 넘기고 있었다. 선풍기 헤드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느릿하게 고개를 저으며 바람을 보냈다. 바람이 닿을 때마다 셔츠 깃이 살랑거렸고, 그 소리가 내 귓가에는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우리는 10분 넘게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보통의 부부라면 "오늘 어땠어?"라든가 "내일은 뭐 할까?" 같은 말들을 주고받았겠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베트남 물가 싸다더니 내 통장은 왜 이 모양일까

토요일 오후, 하노이 미딩 근처의 대형 마트 계산대 앞은 늘 활기가 넘친다. 내 앞줄에 선 외국인 가족은 카트에 수입 치즈와 와인을 가득 담았고, 그 뒤의 베트남 젊은 부부는 아이용 기저귀 대용량 팩을 두 개나 챙겼다. 나는 아내와 함께 카트 손잡이를 잡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담은 건 별거 없었다. 늘 먹는 쌀 5kg 한 포대, 계란 한 판, 아침 대용으로 먹을 우유와 식빵, 그리고 한국산 고추장 작은 것 하나 정도였다. 계산원이 바코드를 찍을 때마다 '삑, 삑'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고, 화면에 표시되는 숫자는 멈출 줄 모르고 올라갔다."250만 동입니다(약 13만 원)." 계산원이 무심하게 건넨 영수증을 받아 드는 순간, 손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이 유난히 서늘했다. 분명 한국에서 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