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생활 기록

아내랑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는데 편했던 순간

흰돛단배B 2026. 4. 12. 03:48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탁을 치우는 소리가 멎었다. 하노이의 밤은 늘 그렇듯 창밖에서 들려오는 오토바이의 낮은 저음과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웃집의 TV 소음으로 채워져 있었다. 거실 스탠드 하나만 켜둔 채 우리는 소파 양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내는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고, 나는 낮에 읽다 만 잡지의 광고 면을 무심하게 넘기고 있었다. 선풍기 헤드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느릿하게 고개를 저으며 바람을 보냈다. 바람이 닿을 때마다 셔츠 깃이 살랑거렸고, 그 소리가 내 귓가에는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우리는 10분 넘게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보통의 부부라면 "오늘 어땠어?"라든가 "내일은 뭐 할까?" 같은 말들을 주고받았겠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아내가 핸드폰 화면을 넘기는 엄지손가락의 규칙적인 움직임, 그리고 내가 잡지장을 넘길 때 나는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만이 우리 사이의 공백을 메우고 있었다. 낯선 타국에서의 삶은 늘 말로 설명해야 하는 것들 투성이였다. 관공서에서, 시장에서, 혹은 아내의 가족들 사이에서 나는 늘 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서툰 언어를 쏟아내야 했다. 하지만 이 거실 안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침묵이 어색하지 않다는 것, 그것은 내가 이 사람과 이 공간에 완전히 동화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정적의 무게

베란다 창문을 조금 열어두었더니 밖에서 들려오는 습한 밤공기 냄새가 거실로 스며들었다. 하노이 특유의 흙먼지와 매연, 그리고 이름 모를 길거리 음식의 탄내가 섞인 냄새였다. 아내는 잠시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더니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아내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스탠드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아내의 콧날과 살짝 가라앉은 머리카락 끝을 보며, 우리가 참 멀리까지 와서 함께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말로 내뱉는 순간, 이 고요하고 단단한 평화가 흩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얼음 트레이를 비트는 딱딱거리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아내는 물 한 잔을 들고 돌아와 내 옆에 내려놓았다.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그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잡지로 눈을 돌렸다. 물은 아주 차가웠고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감각이 찌릿했다. 아내는 다시 제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고 앉았다. 선풍기 바람이 아내의 발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시계 바늘이 10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거실의 공기는 정지해 있었다.

가끔은 대화보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오늘 우리가 나눈 침묵은 "나 여기 있어" 혹은 "너도 거기 있구나"라는 확인 같은 것이었다. 하노이에서의 고단했던 하루가 이 정적 속에서 서서히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잡지를 덮고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으니 밖에서 들려오는 오토바이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밀려왔다 밀려갔다. 아내는 이제 핸드폰을 내려놓고 무릎 위에 손을 올린 채 멍하니 앞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같은 방향을 보고 앉아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흐르는 것들

거실 구석에 놓인 작은 화분의 잎사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선풍기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밖에서 불어온 미풍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떨림을 한참 동안 지켜봤다. 초록색 잎사귀 끝에 맺힌 작은 먼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찰나를 목격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그 장면이 유난히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아내는 작게 하품을 하더니 기지개를 켰다. 옷감이 마찰하며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깼지만, 그것조차 이 공간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아내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내 어깨를 툭툭 두 번 두드리고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게 "이제 자자"는 신호라는 걸 나는 안다. 나는 바로 일어나는 대신 잠시 더 앉아 있었다. 아내가 떠난 소파 자리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스탠드를 끄자 거실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창밖 가로등 불빛이 베란다 틈 사이로 들어와 바닥에 기다란 그림자를 만들었다. 나는 그 그림자를 밟으며 방으로 향했다.

방 안에서는 아내가 이불을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침대맡에 놓인 물컵을 정리하고, 식탁 위에 남은 작은 물방울들을 무심히 쳐다보다가 그대로 두기로 했다. 하노이의 밤은 여전히 소란스러웠지만, 창문을 닫은 우리 집 거실은 다시 익숙한 고요함으로 채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