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난간에 팔을 걸치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로등 불빛 아래로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하노이의 도로는 완전히 잠들지 않은 모양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오토바이의 낮은 엔진 소리가 습한 공기를 타고 묵직하게 전해졌고, 건너편 아파트 단지의 불빛들은 안개에 번져 흐릿한 주황색 점들로 보였다. 나는 낮에 마시다 남은 캔커피의 미지근한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켰다. 입안에 남은 텁텁한 단맛이 오늘 하루의 피로와 뒤섞여 묘한 기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문득 발아래를 지나가는 오토바이 불빛 하나를 끝까지 쫓아가 봤다. 저 사람은 이 늦은 시간에 어디로 가는 걸까, 내일 아침이면 또 어떤 얼굴로 일터를 향할까 하는 아무런 의미 없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그냥 문득, 내가 여기서 얼마나 더 살고 있을지 생각이 스쳤다. 3년 전, 국제결혼을 결정하고 하노이에 정착했을 때만 해도 이런 종류의 생각은 내 머릿속에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고 믿었지만, 막상 삶의 터전이 된 하노이는 매일 아침 나에게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생활의 조각들을 던져주고 있었다.
안개 속에 가려진 미래의 실루엣
익숙해질 법도 한데, 하노이의 무질서함은 가끔 나를 지독하게 무덤덤하게 만든다. 낯선 언어들 사이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지만, 정작 내 마음속 깊은 곳의 불안을 털어놓을 곳은 마땅치 않았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통화를 해도 "거기 물가 싸서 좋겠다"는 식의 대답이 돌아오면 그냥 입을 닫게 된다. 그들이 생각하는 낭만적인 베트남과 내가 매일 마주하는 치열한 하노이는 너무나도 간극이 컸다. 아이가 자라고, 교육 문제가 현실로 다가올 때마다 내 생각의 무게는 가로등 불빛보다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여기서 계속 살아가는 게 최선일까, 아니면 언젠가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하는 물음들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안방에서는 아내가 곤히 잠든 소리가 들려왔다. 저 평온한 숨소리를 지키기 위해 나는 매일 하노이의 매연 속으로 뛰어들고, 서툰 베트남어로 사람들과 부딪힌다. 사랑은 분명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지만, 가끔은 그 힘이 과부하가 걸려 잠시 멈춰 서고 싶을 때가 있다. 특히 오늘처럼 안개가 깊게 낀 밤이면,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방향인지 누군가에게 묻고 싶어진다. 경제적인 현실, 문화적인 차이,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느껴야 하는 보이지 않는 벽들.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쌓여 내 밤을 조금씩 잠식하고 있었다.
나는 베란다 의자에 앉아 담배 대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노이의 밤공기는 여전히 눅눅했고, 피부에 닿는 감촉은 끈적거렸다. 이 끈적임이 마치 내가 처한 현실 같다는 생각을 했다. 털어내려 해도 쉽게 떨어지지 않고, 익숙해지려 해도 매번 낯선 그런 기분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끈적임이 내가 이 땅에 뿌리 내리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낯설기만 했던 풍경들이 어느새 내 일상이 되었고, 그 일상 안에서 나는 조금씩 무뎌지며 단단해지고 있었으니까.
불확실함이 주는 기묘한 평온
다시 거실로 들어와 불을 껐다. 어둠이 내려앉은 집안은 낮의 소란함과는 전혀 다른 공기를 품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창밖 가로등 불빛이 벽면에 만드는 그림자를 멍하니 쳐다봤다. 정답이 없는 고민을 붙잡고 있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면서도, 하노이의 밤은 자꾸만 나를 생각의 늪으로 끌어당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런 고민 끝에도 결국 내가 돌아갈 곳은 아내 옆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내일 아침이면 다시 물가를 걱정하고 서툰 베트남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겠지만, 그 모든 과정이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삶의 일부라는 걸 부인할 수는 없다.
고민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미래는 여전히 창밖의 안개처럼 뿌옇다. 하지만 그 뿌연 풍경 속에서도 우리는 길을 찾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대단한 확신은 없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빈 캔을 찌그러뜨려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방으로 향했다.
이불을 끌어올려 덮으니 아내의 온기가 전해졌다. 밖에서는 여전히 오토바이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지나갔지만, 나는 그 소리를 무시한 채 눈을 감았다. 내일은 또 내일의 하노이가 시작될 것이고, 나는 그 무질서한 흐름 속에 다시 내 몸을 맡길 것이다. 생각들은 잠시 머리맡에 놓아두기로 했다. 지금은 그저 이 고요한 정적 속에서 깊은 잠에 드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인 것 같아 나는 천천히 의식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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