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진짜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쳤다. 한국에서 이사를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대충 복덕방 가서 계약서 쓰고 살면 그만인 줄 알았다. 근데 베트남은 시작부터가 완전 딴판이었다. 노이바이 공항에 내려서 후끈한 공기를 마실 때만 해도 내가 여기서 '유령 인간' 취급을 받으며 한 달을 보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특히 이름도 생소한 '땀쭈'라는 녀석이 내 정착 초기 꿈을 아주 처참하게 박살 낼 줄이야.
처음 만난 집주인 아저씨는 인상이 참 좋았다. 금테 안경을 쓰고 서툰 영어로 "땀쭈는 내가 온라인으로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고 짐이나 풀라"며 환하게 웃는데, 그 미소에 홀딱 속아 아무 의심 없이 내 소중한 여권을 넘겨줬다. 그땐 그게 베트남식 서비스인 줄 알고 "땡큐"를 연발하며 좋아했는데, 그게 내 고생의 서막이었다. 입주하고 일주일, 이주일이 지나도 그 흔한 신고 완료 문자나 서류 한 장이 없길래 슬슬 불안해졌지만, "곧 되겠지" 하며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생활비 때문에 현지 은행 계좌를 만들러 갔을 때 결국 사건이 터졌다. 은행 직원이 내 여권을 한참 조회하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시스템에 당신 이름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 나는 분명 이 도시에 살고 있고 집세도 냈는데, 국가 시스템은 나를 부정하고 있었다.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기분이었고, 등 뒤로 식은땀이 쭉 흐르면서 내가 지금 여기서 불법 체류자가 된 건가 싶은 공포가 확 밀려왔다. 직원의 사무적인 말투가 그날따라 왜 그렇게 차갑게 들리던지 모르겠다.
은행 문을 나서는데 하노이의 그 덥고 습한 공기가 숨이 턱 막히게 느껴졌다. 지나가는 수천 대의 오토바이 소리는 왜 그렇게 비웃는 것처럼 시끄러운지, 나만 이 거대한 도시에서 붕 떠 있는 것 같아 한참을 길가에 멍하니 서 있었다. 집주인한테 전화를 걸었더니 "시스템이 점검 중이다", "담당 공안이 시골 집으로 휴가를 갔다"는 뻔한 변명만 늘어놓길래 진짜 열이 끝까지 뻗쳤다. 말로만 듣던 베트남식 '까오무(변명)'를 내가 직접 당하고 있었다.
집 앞 카페에 죽치고 앉아서 쓰디쓴 카페 쓰어다를 연거푸 세 잔이나 들이켰다. 얼음이 다 녹아 미지근해진 커피를 마시며 다리를 덜덜 떨고 있는데, 집주인은 전화를 아예 안 받기 시작했다. 사람이 진짜 궁지에 몰리니까 눈에 뵈는 게 없더라. 가방을 챙겨 들고 무작정 동네 공안국(현지 경찰서)을 찾아갔다. 낡은 노란색 건물의 퀴퀴한 종이 냄새와 천장에서 덜컹거리며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 소리를 들으며 대기석에 앉아 있는데 진짜 자괴감이 몰려왔다.
제복 입은 공안이 나를 무심하게 쳐다보며 "당신 주소지로 신고된 내역이 전혀 없다"고 딱 잘라 말했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집주인이 거짓말을 한 게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길로 집주인에게 "지금 당장 공안국으로 안 오면 나 이 집에서 그냥 짐 싼다. 그리고 대사관에 신고하겠다"고 강하게 메시지를 날렸다. 착한 외국인 코스프레는 그날로 때려치우기로 했다. 평소엔 느긋하던 사람도 돈줄이 끊기거나 문제가 커질 것 같으니 그제야 허겁지겁 나타나더라.
다음 날 오후,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던 노란색 종이 한 장을 받았다. 조잡한 인쇄물에 붉은 도장이 쾅 찍힌 '땀쭈 증명서'. 그 종이 쪼가리 하나가 뭐라고 손이 다 떨릴 정도로 안심이 됐다. 이 종이가 없으면 나는 여기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는 사실이 서글프면서도 다행이었다. 다시 은행으로 달려가 통장을 만들고 체크카드를 손에 쥐던 그 순간의 쾌감은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다. 이제야 여기서 쫓겨날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진짜 거주자'가 된 기분이었다.
며칠 뒤에 집주인이 미안했는지 망고를 한 바구니 사 들고 와서 "쏘리, 쏘리" 하며 특유의 넉살 좋은 웃음을 지었다. 사람 피를 말려놓고는 망고 몇 알에 퉁치려는 그 모습을 보니 화가 나다가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이게 베트남이구나" 싶었다. 그날 이후로는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은 확실히 들더라. 그 뒤로는 뭐 하나 안 되면 그냥 바로바로 들이밀고 따지는 습관이 생겼다.
벌써 꽤 시간이 지났지만, 가끔 서랍 정리하다 그 낡은 노란 종이를 발견하면 절로 웃음이 난다. 그때는 진짜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하노이 정착기 중에 가장 스펙터클하고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다. 그 치열했던 한 달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이 도시의 불협화음을 즐기며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덕분에 하노이의 이 정신없는 소음과 느긋함이 이제는 제법 정겹게 느껴진다. 오늘도 창밖 오토바이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집주인이 준 것보다 훨씬 달콤한 망고나 하나 까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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