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생활 기록

하노이에서 서류 하나 때문에 멘붕 왔던 날의 기록

흰돛단배B 2026. 4. 10. 15:08

인간의 인내심이 종잇장처럼 얇아지는 순간이 있다면, 아마도 낯선 타국의 공공기관 창구 앞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제가 딱 그런 날이었습니다. 비자 연장을 위해 몇 날 며칠을 준비한 서류 뭉치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출입국 관리소로 향했지만, 결과는 참담한 '빠꾸'였습니다. 그것도 제가 전혀 예상치 못한, 아주 사소해 보이는 종이 한 장 때문이었죠. 그 순간 제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고, 등 뒤로는 차가운 식은땀이 흐르더걸요.

내 노력이 부정당하는 3초의 순간

"이거 없어요. 다시 해오세요." 무표정한 직원의 한마디와 함께 서류 뭉치가 제 쪽으로 밀려왔습니다. 제가 놓친 건 아주 작은 거주 확인증 사본이었는데, 하필 집주인이 해외 여행 중이라 당장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3주 동안 공들여 준비한 모든 과정이 그 3초 만에 무너지는 기분이었습니다. 하노이의 습한 공기가 가뜩이나 무거운 어깨를 짓누르는데, 창구 너머 직원의 무심한 눈빛은 제 자존심마저 깎아내리는 것 같아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대기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베트남어들이 웅성거리고, 천장의 낡은 팬은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고 있었죠.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이깟 종이 한 장이 뭐라고 내 하루를, 내 기분을 망치는 걸까' 하는 근원적인 회의감이 밀려왔습니다. 멘붕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한, 일종의 고립감이 저를 덮쳤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 베트남 아저씨가 제 어깨를 툭툭 치며 말도 안 통하는 저에게 생수 한 병을 건넸습니다.

생수 한 병에 담긴 '베트남식' 위로

아저씨는 환하게 웃으며 "콩 사오(괜찮아)"라고 짧게 말했습니다. 그 별거 아닌 한마디와 미지근한 생수 한 병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이상하게 녹아내리더군요. 그래, 어차피 오늘 안 되면 내일 하면 되는 거고, 안 풀리면 돌아가면 그만인데 제가 너무 날이 서 있었던 겁니다. 아저씨의 응원 덕분인지, 기적적으로 집주인 친구와 연락이 닿아 서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결국 그날은 일을 다 마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의 노을은 유독 붉고 아름답더군요. 서류 한 장에 무너졌던 제 기분도 조금은 차분해진 느낌이었습니다.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자부했지만, 결국 현장에서 부딪쳐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 참 많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다음 주에 다시 그 창구 앞에 설 때는, 반려당하더라도 아저씨처럼 웃으며 "콩 사오"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 한 조각은 챙겨가려 합니다.

 

오늘의 멘붕은 결국 내일의 웃음거리가 되겠지요. 젖은 서류 뭉치를 가방에 넣으며, 하노이의 긴 하루를 그렇게 마무리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예상치 못한 일에 조금은 덜 놀라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