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 하노이의 열기는 정점에 달해 있었다. 거실 창문을 열어두었더니 습하고 뜨거운 공기가 거실 바닥 타일에 눅눅하게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예전 같으면 곧장 에어컨을 켜고 창문을 닫았겠지만, 오늘은 그냥 그 끈적임을 내버려 두었다. 선풍기 날개가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하얀 회벽 모서리에 아주 작은 도마뱀 한 마리가 멈춰 서 있었다. 꼬리를 아주 미세하게 흔들며 먹잇감을 노리는 그 모습이 이제는 징그럽지도, 신기하지도 않았다. 그저 '오늘도 제 자리에 있구나' 하는 정도의 무덤덤한 확인뿐이었다.
냉장고에서 꺼낸 생수병 표면에 금세 물방울이 맺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나는 수건을 가져와 닦는 대신 손가락으로 그 물방울을 훑어 내렸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감각이 금세 미지근해졌다. 밖에서는 공사장의 망치 소리와 오토바이의 엔진음이 뒤섞여 들려왔다. 하노이 어딜 가나 들리는 이 소음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배경음악처럼 고요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소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 뇌가 이 소음들을 일상의 일부로 분류해버린 모양이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딱히 잠이 오는 것도 아닌데 눈을 감고 있었다.
익숙한 소음과 무심한 시선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슬리퍼를 끌고 집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이웃집 베트남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아주머니는 장바구니를 든 채 나에게 가벼운 목례를 건넸고, 나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그저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 나누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1층 로비로 나오니 경비원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의 옆에 놓인 작은 라디오에서는 베트남 전통 가요가 흘러나왔다. 꺾임이 심한 그 멜로디가 예전에는 소음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그 리듬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길을 건너는 것도 이제는 일이 아니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오토바이 행렬 사이로 눈을 맞추며 일정한 속도로 걷기만 하면 된다는 걸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멈추거나 뛰지 않고, 그저 흐름의 일부가 되어 반대편 보도로 건너갔다. 편의점 안은 에어컨 바람 덕분에 서늘했다. 나는 진열대에서 익숙한 브랜드의 캔커피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계산대 직원은 핸드폰 게임에 열중하다가 내가 캔을 내려놓자 그제야 바코드를 찍었다. 거스름돈으로 받은 낡은 지폐 한 장을 지갑에 대충 찔러 넣고 밖으로 나왔다. 캔커피의 알루미늄 감촉이 손바닥을 기분 좋게 자극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노점상 아주머니가 파는 잘라 놓은 망고를 봤다. 노란색이 아주 선명해서 잠시 멈춰 섰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살 거냐고 묻지 않았고, 나도 가격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냥 서로 한 번 쳐다보고 지나쳤다. 하노이의 길거리는 이런 무심함이 가득해서 좋다.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나도 누구에게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는 자유. 그 자유가 나를 이 도시의 일부로 섞이게 했다. 골목길 담벼락에 늘어진 전선들 사이로 비치는 오후의 햇살이 타일 바닥 위에 불규칙한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 무늬를 밟지 않으려고 보폭을 조절하며 걸었다.
오후 4시의 공백
다시 집에 돌아와 캔커피를 땄다. 치익, 하는 소리가 주방에 짧게 울렸다. 커피는 생각보다 달았고 끝맛이 텁텁했다. 주방 창문을 통해 내려다본 도로는 여전히 분주했다. 학교 수업이 끝났는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떼를 지어 지나갔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특별히 예전 생각이 난 것도, 아이들이 부러운 것도 아니었다. 그냥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 자체가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이었다. 시계 바늘이 4시를 지나고 있었다.
빨래 바구니를 뒤져 수건 몇 장을 세탁기에 넣었다. 물이 차오르는 소리와 세탁기 통이 돌아가는 기계음이 베란다를 채웠다. 나는 세탁기 위에 손을 올리고 그 진동을 가만히 느껴봤다. 일정한 리듬으로 떨리는 기계의 움직임이 내 손바닥을 타고 팔꿈치까지 전달됐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이런 사소한 감각들이 유난히 선명하게 다가왔다. 세탁기가 멈추면 빨래를 널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 거실 소파로 돌아왔다. 아까 보았던 도마뱀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벽면에는 도마뱀이 머물렀던 자리만 하얗게 남아 있었다.
핸드폰을 켜서 날씨 정보를 확인했다. 내일은 오늘보다 습도가 더 높을 예정이라고 했다. 큰 의미는 없었다. 하노이에서 습도가 높다는 건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니까. 나는 핸드폰을 던져두고 다시 눈을 감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빵빵거리는 소리가 아주 멀게 느껴졌다가 다시 가깝게 들리기를 반복했다. 어느 순간 내가 한국에 있는지 하노이에 있는지 헷갈릴 정도로 이 낯선 도시의 소리들이 내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이제는 이 무질서함이 오히려 질서 정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고, 나 또한 그 자리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무의미한 관찰의 끝
세탁기가 다 돌아갔다는 신호음이 들렸다. 나는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 젖은 수건을 하나씩 털어 건조대에 널었다. 탁, 탁 하고 수건이 펴지는 소리가 좁은 베란다 벽을 타고 울렸다. 젖은 천에서 나는 특유의 세제 냄새와 하노이의 매연 냄새가 섞여 묘한 향기를 만들어냈다. 마지막 수건을 널고 나니 손끝이 쭈글쭈글해져 있었다. 나는 손을 털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거실의 조도를 조금 낮추고 스탠드를 켰다. 노란 불빛 아래로 먼지들이 춤을 추듯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 먼지들의 움직임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그들은 아무런 방향도, 목적도 없이 그저 공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아내는 오늘도 조금 늦을 모양이다. 저녁을 무엇을 먹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냉동실에 있던 만두를 꺼내 놓았다. 만두 피 표면에 서린 서리가 상온의 공기를 만나 금세 투명하게 변해갔다. 나는 만두가 녹기를 기다리며 식탁 의자에 앉아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손톱 끝이 조금 거칠어진 것 같아 손톱깎이를 가져와 다듬었다. 깎여나간 손톱 조각들이 검은색 식탁 위로 흩어졌다. 나는 그 조각들을 하나하나 모아 휴지에 싸서 버렸다.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하는 행동들이었지만, 그 과정들이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무의미한 일련의 행위들이 나를 오늘 하루라는 시간에 묶어두고 있었다.
밖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건너편 아파트 단지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주황색 조명들이 밤하늘의 안개와 섞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나는 그냥 창문을 닫았다. 실내로 들어오는 소음을 차단하고 싶어서였다. 창문을 닫자 실내엔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남았다. 나는 다시 소파에 앉아 아까 마시다 남은 캔커피를 들이켰다. 커피는 이제 완전히 미지근해져서 단맛만 강하게 느껴졌다. 캔을 찌그러뜨려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깡통이 바닥에 부딪히며 내는 금속음이 날카롭게 들렸다.
오늘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 아무 일 없던 시간 덕분에 하노이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나는 만두를 찌기 위해 냄비에 물을 올리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였다. 치익 소리와 함께 파란 불꽃이 올라오는 것을 보며 아내가 오기 전에 식탁을 닦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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