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생활 기록

하노이에서 아무 일도 없던 하루가 오히려 기억에 남는 이유

흰돛단배B 2026. 4. 7. 18:50

오늘은 정말이지 아무 일도 없었다. 아침 7시 15분, 평소보다 조금 늦게 눈을 떴을 때 천장에서 돌아가는 실링팬은 어제와 똑같은 속도로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창밖은 하노이 특유의 습한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오토바이 경적 소리는 습기에 짓눌려 평소보다 둔탁하게 들렸다. 침대에서 일어나 발바닥에 닿는 타일의 서늘한 감촉을 느끼며 주방으로 향했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물이 끓기 전까지의 그 짧은 정적 속에서 나는 내가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잠시 잊기로 했다. 특별히 바쁜 일이 없어서라기보다, 그냥 그 순간의 정적이 깨지는 게 싫었을 뿐이다.

연유를 듬뿍 넣은 카페쓰어다 한 잔을 내리고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커피잔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내 안경 너머로 번졌고, 나는 그 뿌연 시야를 굳이 닦아내지 않았다. 한참 동안 창밖의 전선 위에 앉아 있는 이름 모를 새 한 마리를 구경했다. 그 새는 깃털을 고르다가 가끔 고개를 돌려 내가 있는 쪽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새가 날아가고 난 뒤에도 나는 그 빈 전선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전선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모양새를 보며 '하노이의 바람은 저 전선을 흔들 만큼의 힘은 있구나' 하는 무의미한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커피가 식어버렸지만 상관없었다.

정오의 정적과 쌀국수 냄새

정오가 되자 배가 고파졌다. 굳이 멀리 나가고 싶지 않아 슬리퍼를 끌고 집 앞 골목으로 나갔다. 늘 가던 노점 식당에서는 오늘도 커다란 솥에서 육수 끓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내가 온 것을 보고도 별다른 인사 없이 쌀국수 한 그릇을 내어주었다. 나는 평소보다 고수를 조금 더 넣었고, 라임을 짜 넣는 손길을 아주 천천히 가져갔다. 국물이 입안으로 들어올 때의 뜨거움과 목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에만 집중했다. 옆 테이블에서는 베트남 청년들이 무언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지만, 내 귀에는 그저 배경음악처럼 흘러갈 뿐이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왜 저렇게 목소리를 높이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쌀국수는 적당히 뜨거웠고, 나는 적당히 배가 불렀다.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작은 슈퍼에 들러 생수 한 병을 샀다. 계산대 앞에 놓인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과자 봉지를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내려놓았다. 주인아저씨는 TV 화면에 고정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거스름돈을 건넸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 벽면에 핀 이끼의 초록색이 어제보다 조금 더 짙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올랐다. 한 층, 한 층 오를 때마다 느껴지는 무릎의 미세한 자극을 세어보기도 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반복이 주는 이 기묘한 안정감이 가끔은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오늘은 그냥 그대로 두기로 했다.

오후 3시, 베란다로 나가 빨래 건조대에 걸린 옷가지들을 확인했다. 습도가 높아서 그런지 아침에 넌 옷들이 여전히 눅눅했다. 손 끝에 닿는 천의 질감이 축축하고 무거웠다. 나는 그 옷들을 걷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차피 내일도 해는 뜰 것이고, 안개가 걷히면 언젠가는 마를 테니까.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과일을 파는 행상인이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무어이~ 무어이~" 하고 외치는 그 소리가 골목 사이사이에 메아리치다가 사라졌다. 나는 그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귀를 기울였다.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이 베란다 위에서 보는 풍경은 멈춰버린 필름 사진 같다. 그냥 멍하니 서 있다 보니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오후의 나른함과 무의미한 독서

다시 거실로 들어와 책장에 꽂혀 있던 오래된 소설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미 서너 번은 읽어서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책이었다. 첫 페이지를 펼치고 문장들을 따라가는데, 자꾸만 시선이 글자 밖으로 벗어났다. 주인공이 누군가와 이별하는 장면이었는데, 나는 그 이별의 아픔보다는 주인공이 마시고 있던 차의 종류가 무엇일까 하는 엉뚱한 의문에 사로잡혔다. 결국 책을 덮고 소파에 누워 천장을 봤다. 실링팬 날개 위에 쌓인 얇은 먼지가 보였다. 저걸 닦아야 하는데, 내일 닦을까, 아니면 그냥 둘까 고민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꿈을 꾼 것 같은데 깨고 나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입안이 조금 말라 있었다.

잠에서 깨어보니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빛이 주황색에서 보라색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봤다. 시계 바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저녁이었다. 아내는 퇴근해서 돌아와 오늘 별일 없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응, 아무 일도 없었어"라고 대답했다. 아내는 그냥 웃으며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 웃음의 의미를 굳이 파헤치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같이 주방에 서서 저녁 준비를 했다. 칼이 도마에 닿는 소리, 물이 끓는 소리, 냄비 뚜껑이 들썩이는 소리가 주방을 채웠다. 별다른 대화는 없었지만 그 공백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찌개 냄새가 거실까지 퍼졌다.

저녁 식사 후에는 소화를 시킬 겸 집 근처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공원 벤치에 앉아 운동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에어로빅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아주머니들, 배드민턴 셔틀콕을 주고받는 아이들,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 그들의 활기찬 모습이 나에게는 마치 다른 세상의 일처럼 보였다. 나는 그저 그 풍경 속에 잠시 머물다 가는 관객 같은 기분이었다. 공원 한쪽 구석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식빵을 구경하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한참을 쳐다봤다. 고양이는 내가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나도 고양이를 따라 잠시 눈을 감고 밤공기의 냄새를 맡았다. 매연 냄새와 풀 내음이 뒤섞인 하노이의 밤공기는 여전히 눅눅했다. 다리에 모기가 한 마리 앉았다가 날아갔다.

하루의 끝에서 마주한 정적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니 몸이 노곤해졌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아침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얼굴인데, 왠지 모르게 조금은 더 담백해진 것 같기도 하다. 오늘 내가 한 일이라고는 먹고, 자고, 멍하니 풍경을 본 것뿐이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 한 잔을 꺼내 마셨다.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차가운 감각이 선명했다. 거실의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가는 길에 발가락 끝이 문턱에 살짝 부딪혔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둔탁한 소리가 정적을 깼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내려놓았다. 화면의 빛이 눈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천장에서 돌아가는 실링팬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들었던 그 소리와 똑같다. 내일도 아마 안개가 낄 것이고, 오토바이 소리는 들려올 것이며, 나는 다시 카페쓰어다를 내릴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오늘 같은 날이 하루 더해졌을 뿐이다. 특별한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질 것 같지도 않은 그런 하루 말이다.

오늘은 그냥 그런 날이었다. 굳이 의미를 붙이지 않아도 괜찮은, 그냥 조용히 흘러간 하루. 나는 옆에서 고르게 숨을 쉬며 잠든 아내의 어깨 위로 이불을 조금 더 끌어올려 덮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