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에서 서류 하나에 붙잡혀 하루를 다 보내고 돌아오던 길
아침 8시. 창밖으로 쏟아지는 하노이 햇살이 유난히 따갑더라니. 어제 미리 챙겨둔 서류 뭉치를 가방에 쑤셔 넣고 오토바이에 올라탈 때만 해도 내 계획은 완벽했다. 점심 전까지 깔끔하게 공증받고, 오후엔 시원한 카페에서 아아나 한 잔 때리며 밀린 일 좀 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하노이는 늘 내 계획을 비웃듯 예상치 못한 변수를 던지곤 한다. 오늘은 그 변수가 내 하루 전체를 집어삼킨 날이다.
5분의 차이가 불러온 거대한 나비효과
오토바이를 타고 공증 사무소로 향하는 길은 거대한 매연 세탁기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배기가스와 달궈진 아스팔트 열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마스크를 썼는데도 입안에서 먼지가 서걱거렸다. 그래도 "이것만 끝내면 된다"는 생각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했는데, 사무소 입구에 붙은 '점심시간 11시부터'라는 문구를 본 순간 첫 번째 멘붕이 왔다. 시계를 보니 10시 55분. 딱 5분 차이로 내 오전이 통째로 증발했다.
베트남 공무원들의 점심시간은 칼보다 정확하다. 셔터가 내려가는 걸 멍하니 보는데 진짜 허탈하더라. 근처 식당에 앉아 분짜 한 그릇을 시켰다. 선풍기도 안 돌아가는 좁은 식당에서 땀을 닦으며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었다. 고기는 타서 딱딱하고 느억맘 소스는 미지근했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사무소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며 낯선 골목길을 정처 없이 서성거렸다. 길가에 앉아 담배 피우는 현지인들이 왜 그렇게 부럽던지.
그냥 집에 갈까? 아니, 오늘 아니면 또 언제 오나 싶어 억지로 버텼다. 땡볕 아래서 한 시간 반을 버티는 건 생각보다 고역이었다.
어제는 되고 오늘은 안 되는 마법의 행정
오후 1시 반, 드디어 문이 열렸다. 내 차례가 되어 서류를 내밀었는데 담당 직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서류, 사본이네요. 원본 가져오세요." 청천벽력 같았다. 분명 어제 전화로 확인했을 때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더니, 오늘 담당자는 말이 달랐다. 말이 안 통하니 파파고까지 돌려가며 "어제는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따져봤지만 돌아오는 건 무심한 눈빛뿐이었다. 하노이 살면서 제일 힘든 게 바로 이거다. 담당자 기분에 따라 룰이 바뀌는 알 수 없는 시스템.
다시 집으로 돌아가 원본을 챙겨 오는데 왕복 두 시간이 걸렸다. 퇴근 시간과 맞물린 도로는 그야말로 주차장이었다. 오토바이 틈바구니에 끼어 매연을 마시며 "제발 문 닫기 전에만 도착하자"고 빌고 또 빌었다. 엉덩이는 저리고 손목은 감각이 없었다. 간신히 다시 도착했을 때 내 몰골은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거울 속 내 모습이 참 처량하더라. 고작 종이 한 장 때문에 이 고생을 해야 하나 싶은 자괴감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도장 하나에 녹아버린 나의 8시간
우여곡절 끝에 원본을 내밀고 붉은 도장이 쾅 찍히는 걸 본 시간이 오후 4시 반이었다. 아침 8시에 집을 나섰으니 고작 이 서류 한 장에 내 8시간이 다 녹아버린 셈이다. 도장이 찍힌 서류를 가방에 넣는데 기쁘기보다는 맥이 탁 풀렸다. 사무소를 나오니 하늘은 어느새 주황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고, 퇴근하는 사람들의 경적 소리는 아침보다 더 날카롭게 귀를 찔렀다. 오늘 하루 내가 한 일이라곤 도로 위에서 시간을 버리고 땀 흘린 것밖에 없었다.
목욕탕 의자에 앉아 마시는 짜다 한 잔의 위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골목 어귀에서 오토바이를 세웠다.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길가 목욕탕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짜다(얼음차) 한 잔을 시켰다. 500원도 안 하는 그 시원한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데 비로소 정신이 좀 들더라. 주변에는 퇴근하고 모여앉아 맥주 한 잔에 웃고 떠드는 현지인들이 보였다. 그들에겐 평범한 하루였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전쟁 같은 시간이었다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져 헛웃음이 났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소리, 상인들이 외치는 소리, 멀리서 들리는 음악 소리... 평소엔 소음이었던 것들이 이상하게 위로처럼 들렸다. 그래, 이게 하노이지. 내가 선택한 곳인데 누굴 탓하겠나 싶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얼음이 다 녹아 미지근해진 차를 마저 마시고 일어났다. 바지에 묻은 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다시 오토바이 시동을 걸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 오늘따라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텅 빈 거실에서 마주한 허탈한 결과물
집에 들어오자마자 샤워기 밑에 섰다. 뜨거운 물이 닿으니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그 공증 서류를 멍하니 쳐다봤다. 이게 뭐라고 내 하루를 다 가져갔을까. 하노이 생활은 가끔 이렇다. 아주 사소한 거 하나 얻으려고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진이 다 빠져버린다. 한국이었으면 진작 끝났을 일이 여기선 하루 종일 걸리는 마법 같은 일이 매일같이 일어난다.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이런 날은 마음 한구석이 텅 빈다.
내일은 또 어떤 변수가 나를 기다릴까. 이제는 "그러려니" 해야 하는데 여전히 허탈한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래도 고생한 나한테 맥주 한 캔은 사줘야겠다 싶어 다시 슬리퍼를 끌고 나갔다. 밤공기는 낮보다 조금 시원해졌고, 어두워진 거리는 낮의 치열했던 흔적을 지운 채 반짝이고 있었다. 오늘 하루도 참 길었다. 진짜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