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생활 기록

베트남 물가 싸다더니 내 통장은 왜 이 모양일까

흰돛단배B 2026. 4. 11. 15:32

토요일 오후, 하노이 미딩 근처의 대형 마트 계산대 앞은 늘 활기가 넘친다. 내 앞줄에 선 외국인 가족은 카트에 수입 치즈와 와인을 가득 담았고, 그 뒤의 베트남 젊은 부부는 아이용 기저귀 대용량 팩을 두 개나 챙겼다. 나는 아내와 함께 카트 손잡이를 잡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담은 건 별거 없었다. 늘 먹는 쌀 5kg 한 포대, 계란 한 판, 아침 대용으로 먹을 우유와 식빵, 그리고 한국산 고추장 작은 것 하나 정도였다. 계산원이 바코드를 찍을 때마다 '삑, 삑'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고, 화면에 표시되는 숫자는 멈출 줄 모르고 올라갔다.

"250만 동입니다(약 13만 원)." 계산원이 무심하게 건넨 영수증을 받아 드는 순간, 손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이 유난히 서늘했다. 분명 한국에서 장을 볼 때와 비슷한 금액인데, 카트 안은 어딘가 휑해 보였다. 3년 전 하노이에 처음 왔을 때, 길거리에서 3만 동(약 1,600원)짜리 쌀국수를 먹으며 "와, 여기서는 진짜 왕처럼 살겠는데?"라고 호기롭게 외쳤던 내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때의 호기는 마트 계산대라는 현실의 벽 앞에서 아주 정중하게 박살 났다. 여행자로 머물 때와 생활인으로 뿌리 내릴 때의 물가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편리함과 위생이라는 이름의 세금

집으로 돌아와 마트에서 사 온 물건들을 식탁 위에 늘어놓았다. 영수증을 하나씩 훑어보니 범인은 명확했다. 로컬 시장에 가면 반값도 안 될 채소와 과일들이 '유기농' 혹은 '세척 완료'라는 라벨을 달고 마트 진열대에 오르는 순간 몸값이 두 배로 뛴다. 아이가 먹을 우유는 수입산이라 한국보다 오히려 비싸고, 고추장이나 된장 같은 한국 식재료는 '사치품'에 가까운 가격표를 달고 있다. 로컬 시장의 위생이 걱정되어 마트를 선택한 대가는 생각보다 가혹했다. 편리함과 안전을 선택할수록 내 통장은 비례해서 얇아지고 있었다.

아내는 정리된 식재료를 냉장고에 넣으며 "이번 달엔 식비를 좀 줄여야겠어"라고 작게 웅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미안함과 걱정이 섞여 있었다. 사실 아내의 잘못이 아니다. 하노이의 생활 물가는 이방인에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겉으로 보이는 저렴한 인건비와 식사비 뒤에는, 주거비와 전기료, 그리고 예상치 못한 각종 '외국인 프리미엄'이 숨어 있다. 에어컨 없이는 단 한 시간도 버틸 수 없는 하노이의 여름, 매달 날아오는 전기료 고지서를 볼 때마다 나는 내가 하노이에 사는지 서울 한복판에 사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오후 4시, 거실 창문을 열어두니 눅눅한 바람이 들어온다. 실링팬을 가장 강한 단계로 틀어놓고 소파에 앉아 가계부를 펼쳤다. 지난달 나간 돈을 정리하다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국제결혼 가정을 꾸리다 보니 챙겨야 할 경조사비는 또 왜 이리 많은지. 베트남의 '축의금' 문화는 한국 못지않게 치밀하고 잦다. 사촌의 결혼식, 조카의 돌잔치, 심지어 이웃집의 집들이까지... 거절하기엔 체면이 깎이고, 다 챙기기엔 내 지갑이 비명을 지른다. "물가 싼 베트남에서 돈 많이 모으겠네"라고 묻던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라 쓴웃음이 났다.

쌀국수 한 그릇의 가짜 마취

가계부를 덮고 집 앞 단골 쌀국수 집으로 향했다. 목욕탕 의자 같은 낮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4만 동(약 2천 원)짜리 고기 국수를 주문했다. 뜨거운 국물을 한 입 들이키면 비로소 "그래, 베트남 물가는 역시 싸지"라는 착각에 빠진다. 이 4만 동짜리 쌀국수는 하노이 생활자들에게 일종의 마취제 같은 역할을 한다. 하루 종일 마트 물가와 전기료에 치이다가도, 이 저렴하고 맛있는 국수 한 그릇을 먹고 나면 "그래도 살만하다"는 가짜 위안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수 그릇을 비우고 일어서서 편의점에 들어가 3만 동짜리 수입 음료수 하나를 집어 들면 마취는 금세 풀린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화려한 자동차들과 우후죽순 들어서는 고층 아파트들을 본다. 하노이의 발전 속도는 눈부시지만, 그 속도에 발맞춰 올라가는 물가는 무섭다. 누군가는 기회의 땅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에게는 처절한 생존의 땅이다. 로컬의 저렴함에 완전히 녹아들기엔 내 식성이 너무 한국적이고, 그렇다고 한국처럼 살기엔 내 수입이 그만큼 압도적이지 못하다. 그 어중간한 경계선 위에서 내 통장은 매달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반복하고 있다.

저녁 공기는 여전히 끈적거린다. 아내와 함께 동네 공원을 한 바퀴 돌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내는 다음 명절(뗏) 때는 고향 친척들에게 줄 선물을 조금 줄여보자고 먼저 제안해왔다. 그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짠했다. 하노이에 오면 더 여유롭고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정작 돈 문제로 아내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우리는 공원 벤치에 앉아 말없이 오토바이 불빛들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장면을 지켜봤다. 저 많은 불빛들 중 내 고민을 덜어줄 빛은 어디쯤 있을까 하는 생각이 그냥 스쳐 지나갔다.

통장 잔고와 하노이의 밤

밤 10시, 핸드폰 뱅킹 앱을 켜서 잔고를 확인한다. 입금되는 날보다 출금되는 날이 훨씬 많은 숫자의 나열. 가끔은 이 숫자들이 나를 비웃는 것 같기도 하다. 하노이의 밤은 화려하게 빛나고, 맥주 거리의 사람들은 즐겁게 건배를 외치는데 내 마음은 왜 자꾸 쪼그라드는 건지. 국제결혼이라는 선택이 준 행복의 무게만큼, 경제적 책임감의 무게도 만만치 않다는 걸 매일 밤 뼈저리게 느낀다. 돈 때문에 아내와 예민한 대화를 나누고 난 밤이면, 미안함과 허탈함이 뒤섞여 천장의 실링팬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이제는 마트 영수증에 일희일비하지 않기로 마음먹어 본다. 그냥 이게 하노이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입장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가끔 한국 대형 마트의 마감 세일 때 집어 들던 1+1 상품들이나, 포인트 적립으로 쏠쏠하게 재미를 보던 소소한 기억들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다. 여기선 그런 작은 재미조차 비싼 대가를 치러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니까. 오늘 하루도 열심히 오토바이를 몰고 길 위를 달렸는데, 남은 건 주머니 속의 꼬깃꼬깃한 영수증 몇 장뿐이다.

내일은 또 어떤 예상치 못한 지출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베트남 생활 3년, 물가에 대한 환상은 이미 깨진 지 오래지만 그래도 내일 아침이면 나는 다시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 것이다. 내가 지켜야 할 가족이 여기 있고, 여기가 내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통장 잔고는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아내가 차려준 따뜻한 밥상 하나에 다시 힘을 내본다. 물가는 비싸고 통장은 비었지만, 그래도 하노이의 밤은 깊어만 간다. 내일은 전기료 걱정 없이 바람이 조금이라도 시원하게 불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불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