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보험 알아보다가 그냥 포기하고 돌아왔던 날
베트남에서 3년이나 살았으면 이제 웬만한 건 다 알 줄 알았습니다. 비자도 혼자 연장해봤고 병원도 몇 번 다녀봤으니, 보험 하나 가입하는 건 일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죠. 근데 그게 제 착각이었습니다. 하노이 시내에 있는 보험사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기가 팍 죽더라고요.
사실 처음엔 아주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현지에서 생활비 관리하면서 혹시 모를 큰 사고나 나면 어쩌나 싶어 보험 하나 들어두려던 것뿐이었거든요. 아내랑 같이 제일 유명하다는 곳을 찾아갔는데, 창구 직원이 내미는 서류 목록을 보고 뒷목을 잡았습니다. 여권은 당연한 거고, 노동 허가증(Work Permit)에 임대차 계약서, 거기다 한국에서 5년 동안 병원 다닌 기록까지 싹 다 영문으로 떼어오라더군요.
진짜, 그때는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한국에서 보험 들고 올걸, 괜히 사서 고생하나 싶더라고요.
가장 짜증 났던 건 보장 내용이었습니다. 상담원이 보여준 약관을 한참 읽어보는데, 정작 제가 걱정하는 수술비나 입원비는 죄다 '예외' 투성이였습니다. 베트남 현지 공립 병원이 아니면 돈이 안 나온다거나, 지정된 병원만 가야 한다는 식이었죠. 솔직히 저 같은 외국인이 베트남 국립 병원 가서 줄 서고 의사 만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입니까? 말도 안 통하고 시설도 낯선데 거길 어떻게 가라고요.
결국 내 돈 내고 가입 안 하기로 했다
상담은 2시간이 넘게 이어졌고, 에어컨도 시원찮은 대기실에서 땀만 뻘뻘 흘렸습니다. 아내가 옆에서 베트남어로 이것저것 물어봐 줬지만 직원은 계속 "규정(Quy dinh)이 이렇다"는 말만 반복하더군요. 창밖으로 팜응옥탁(Pham Ngoc Thach) 거리의 오토바이 떼를 멍하니 보고 있는데 진짜 현타가 왔습니다. 내가 여기서 내 돈 주고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싶더라고요.
옆에서 제 표정을 살피던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슬쩍 말했습니다. 나 때문에 고생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거든요. 그랬더니 아내는 오히려 제 손등을 토닥이며 "오빠, 천천히 해도 돼. 너무 서두르지 마"라고 말해주더군요. 그 따뜻한 손길에 뾰족했던 화가 좀 풀리긴 했지만, 하노이 특유의 습한 공기 때문인지 가슴 속은 여전히 답답했습니다.
보험사 건물 나오자마자 노점에서 짜다(Tra da) 한 잔 사 마셨는데, 얼음은 다 녹아서 미지근하고 맛도 없었습니다. 아내한테 그냥 관두자고 했습니다. 서류 떼러 한국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장도 확실치 않은데 매달 돈을 쏟아붓는 건 바보 같은 짓 같았거든요. 차라리 그 돈으로 맛있는 거 사 먹고 비상금이나 따로 모으는 게 속 편하겠다 싶었습니다.
이방인으로 산다는 게 가끔은 이렇게 안전망 없이 혼자 서 있는 기분을 만드네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토바이 경적 소리는 왜 그렇게 시끄러운지. 아내 손을 잡고 걷는데 그냥 좀 씁쓸했습니다.
보험 증서 하나 없다고 당장 죽는 건 아니니까요. 그냥 오늘은 일찍 자야겠습니다. 머리만 아프네요.